요즘 읽고 있는 책입니다. 동양인 최초 노벨 문학상 시집입니다
서점에 검색을 해보니 베스트 셀러로 등록이 되어있다 .
다른 독자들의 리뷰도 괜찮은 편이다
“어떻게 해야 한 방울의 물이 영원히 마르지 않을까?”
“바다에 던져지면 되느니.....,”
‘인도 콜카타에서
장거리 기차 여행을 하다 보면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린다.
무엇인가 그리움 같은 울림이다.
노래에 이끌려 가 보면 열차와 열차를
연결하는 통로에 앉아 예닐곱 명 정도의
인도인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무슨 노래냐고 묻자 타고르의 시라고 한다.
그렇게 타고르의 시는 벵골 사람들 사이에서
여전히 노래로 불리고 있다.’
타고르 시인에 대해 좀더 자세하게 알아보자
“나는 여러 날 동안 이 번역된 원고 뭉치를 가지고 다니면서 기차 안에서도, 버스에서도, 혹은 식당에서도 읽었으며, 또 낯선 사람이 내가 얼마나 감동하는지 알아볼까 두려워 가끔 그 원고를 덮어두어야 했다.” 영국의 저명한 시인이며 훗날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W. B. 예이츠는 1912년에 우연히 한 친구로부터 어느 무명의 인도인 작가가 썼다는 시 원고를 건네받아 읽어보고 크게 감동했다. 예이츠의 추천 덕분에 마침내 영국에서 간행된 그 시집의 제목은 [기탄잘리(獻詩)]였고, 이듬해인 1913년에 그 저자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아시아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1861년 5월 7일, 인도 벵골 주 캘커타의 저명한 브라만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19세기 초에 영국 동인도회사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으며, 부친 데벤드라나트 타고르는 힌두교의 개혁에 관심을 두어 ‘마하르시’(위대한 성자)라는 호칭을 얻은 인물이었다.
열네 번째 자녀이며 막내로 태어났지만 라비(라빈드라나트)는 여러 가지 일로 바빴던 부모의 사랑을 차지하지는 못했다. 대신 다섯째 형인 조티린드라나트와 형수 카담바리가 라비에게는 부모 노릇을 대신해 주었다. 라비는 7세에 학교에 들어가고 8세에 처음으로 시를 썼다.
가문의 배경 덕분에 최고의 교육을 받았지만, 억압적이고 무미건조한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서 성적은 바닥에 머물렀다. 12세 때인 1873년에 라비는 부친을 따라 히말라야 여행을 다녀온다. 여행 중에 두 사람은 가문의 소유인 벵골 서부의 평야 마을 산티니케탄에 들렀는데, 이곳은 훗날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교육 실험의 무대가 된다.
하지만 그건 한 세대 뒤의 일이었고, 14세 때인 1875년에 라비는 결국 정규 교육을 포기한다. 그의 시가 처음으로 잡지에 간행된 것도 이 즈음의 일이었다. 타고르 가문은 당대의 다른 인도 명문가와 마찬가지로 서구 문화에 호의적이었고, 특히 ‘벵골 르네상스’로 일컬어지는 사회 및 문화 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덕분에 라비는 일가친척이 발행하는 여러 문학잡지를 무대로 문학적 재능을 일찌감치 뽐낼 수 있었다. 하지만 젊은 시절에만 해도 문학은 어디까지나 소일거리였으며, 가족은 라비가 관직이나 사업 같은 보다 버젓한 분야로 진출하도록 독려했다.
1878년에 라비는 영국 유학길에 올라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 입학했지만, 이곳에서의 학교생활 역시 인도에서와 마찬가지여서, 불과 1년 반 만인 1880년 말에 아무런 성과 없이 귀국하고 말았다. 이후 라비는 부친의 명령을 받들어 가족 재산 관리를 담당하는 한편 시, 희곡, 단편소설, 비평, 수필 등 여러 가지 분야의 작품을 발표하며 다양한 실험에 몰두한다.
22세인 1883년에는 10세의 평범한 소녀 바바타리니를 아내로 맞이했으며(그 직후에 라비는 아내에게 ‘므리날리니’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었다), 두 사람은 이후 17년 동안 함께 살며 5명의 자녀를 낳았다. 1890년에는 유럽을 여행했고, 그해 말에 귀국하자마자 시집 [마나시](1890)가 간행되어 문단에 신선한 반향을 일으키며 진지한 작가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타고르는 1901년에 사재를 털어 산티니케탄에 학교를 설립했고, 1912년에는 인근 스리니케탄에 농업 공동체를 설립했다. 교육 및 농업 분야에서의 이런 개혁은 간디보다 20년, 인도 정부보다 50년이나 앞선 것이었으며, 타고르는 훗날 노벨 문학상으로 받은 상금 전액을 그 운영비용으로 쾌척할 정도로 큰 애정을 쏟고 일생일대의 사업으로 여겼다.
특히 타고르는 인도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을 계몽하지 않고는 어떤 변혁도 힘들다는 자각을 지녔었는데, 농민에 대한 이런 깊은 관심은 타고르와 간디가 당대의 여타 인도 지식인과 가장 차별화됐던 요소로도 평가된다.
하지만 이 즈음에 타고르는 개인적으로 큰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아내와 부친, 심지어 아들과 딸이 수년 사이에 연이어 사망하는 불상사가 일어나는가 하면, 야심만만하게 시작한 학교 및 공동체 사업도 재정난에 부딪치고 말았다. 결국 타고르는 그때까지 나온 저서의 판권을 헐값에 출판사에 넘기고 말았다.
20세기 초의 10여 년간 타고르가 겪었던 온갖 고통과 울분은 고스란히 시로 승화되어 1910년에 발표된 한 권의 시집 속에 차곡차곡 쌓이게 되었다. 타고르는 이 가운데 50여 편을 직접 영어로 번역해서 우연한 기회에 해외에 알리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그의 대표작 [기탄잘리(獻詩)]였다.
타고르는 1912년에 영국으로 가는 배에서 벵골어로 간행된 [기탄잘리]에 수록된 157편의 시 가운데 일부를 번역했고, 런던에서 만난 한 영국인 친구에게 그 원고를 보여주었다. 화가였던 그 친구는 이 원고를 주위의 문인들에게도 보여주었고, 시인 W. B. 예이츠가 원고를 읽고 크게 감탄한 나머지 적극적으로 출간을 주선했다.
그해 말에 이르러 예이츠의 서문을 덧붙여 영어판 [기탄잘리]가 영국에서 간행되었다. 동명의 벵골어 시집에서 52편, 여타의 시집에서 51편을 골라 모두 103편을 수록한 이 작품집 덕분에 타고르는 하루아침에 인도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전 세계에 각인되었다.
이듬해인 1913년에 타고르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는데, 아시아인으로는 최초의 일이어서 더욱 주목을 받았다. 이때부터 타고르는 명사가 되었고, 마침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의 정치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면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더욱 주목받게 되었다.
간디의 협력 요청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길이 다르다는 이유로 끝내 거절하고 말았던 타고르였지만, 영국의 폭압을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았다. 1919년 4월 13일, 인도인 수백 명이 시위 중에 영국군의 총격으로 사망한 암리차르 학살 사건이 터지자 분격한 타고르는 노벨 문학상 수상 직후에 영국에서 받은 작위를 총독에게 반납했다.
이후 타고르는 간디와 함께 인도를 대표하는 지식인 겸 유명인사로 존경받았다. 1931년의 70세 생일에는 전 세계에서 축전이 답지했다. 1940년에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이는 타고르가 평생 받은 유일한 학위증명서였다. 1941년 7월 30일에 타고르는 병으로 수술을 받았고, 그래도 병세가 악화되어 8월 7일에 결국 사망했다. 타고르는 생전에 죽음을 대비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저 평화로운 바다에
위대한 조타수가 배를 띄우네
그대 영원한 반려자여
죽음의 사슬이 사라지고
광대한 우주의 품에 그대 안기리
두려움 모르는 그대 가슴 속에서
위대한 미지를 감지하리
출처- 네이버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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